본문 바로가기

초등학교 5학년

[5/5]어린이명예연구원 출범과 농진청 체험 탐방⑤

고려시대의 농업(935년 ~ 1392년)

 

연작농법을 위한 노력 1년1작의 성립.

목화전래로 의생활이 크게 달라짐.

 

휴한농업 → 연작농업

 

고려시대에는 농경지 확대를 정책적으로 추진하여 개간과 간척이 활발해짐에 따라

심경쟁기와 같은 농기구가 발달하였으며, 산지에는 계단식 밭이 발달하였고,

연해안 저습지까지 경작지가 확대되었습니다.

수리시설은 지방단위로 늘려가며 관리를 하였고, 휴한농법(休限農法)을 극복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후기에 이르면 연작농법(連作農法)이 일반화되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채소의 재배가 널리 이루어졌고, 작물을 재배하기 적당하지 않은 땅에서는

유실수(有實樹)를 심게 하여 최대한의 농업활동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특히 고려시대 말에는 문익점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목화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여

면포를 짜서 옷을 입으면서 의생활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고려시대(935년 ~ 1392년)

- 병기로 농기구룰 제작(성종).

-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경작(인종).

- 토양에 따라 뽕나무 · 닥나무 · 밤나무를 재배할 것을 권장(인종).

- 심경쟁기의 출현(개간용).

- 채소농사의 발달로 김치의 종류가 늘어남.

- 2년 3작 가능.

- 중국의 강남쌀 도입.

- 왜구의 침탈로 포기했던 해안 지역을 경작지로 개간.

- 목화씨 도입과 재배 성공(공민왕대, 문익점, 정천익) : 의생활의 일대 변화 발생.

- 원(元)나라 농서인 농상집요 재간행(공민왕대, 이암, 강시).

- 시비법, 제초법의 발달로 연작농법 정착. 

 

 

조선시대 전기 농업

 

농업기상학의 성립과 농업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달.

 

조선은 개국과 함께 농업을 나라의 근본으로 정하고 나라와 백성의 삶을 살찌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세종 때에는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천체를 관측하여 우리의 달력인 칠정산을 만들었으며,

바람의 방향을 측정하고 강수량 등을 정확히 측정하여 농업기상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발달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농업은 더욱 발달하여 논 · 밭농사에서 묵히는 땅이 없어져 1년1작이

안정적으로 실시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2년3작이 가능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전기 직파    →  조선시대 후기 이앙

                       2년3작 →  1년 2작

 

 

 

조선시대 온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때 제주에서 가져온 귤나무의 성장을 시험하기 위해 강화도에 온실을

설치하였고, 성종 때에는 임금에게 겨울에 꽃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순의(세종때)가 지은 「산가요록」에는 겨울철에 채소를 가꾸는 방법과 함께 온실을 짓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어 온실의 구조와 과학적 원리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온실은 온돌시설 위에 흙을 덮고 작물을 심어 뿌리부분을 데워서 생장을 촉진 하였으며,

쇠솥에 물을 끓여 목관을 통해 증기를 내부에 뿜어내어 습도를 조절하였습니다.

작물의 뿌리부분을 덥히는 방식은 실내만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보다 훨씬 성장이 촉진되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어 아주 과학적인 시설재배가 조선시대 초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전기(1392년 ~ 1592년)

- 농본국가의 면모 정립 :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 선농단에서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왕이 친히 밭을 가는 모범을 보임.

- 북방개척과 농지개간 장려 : 농사권장.

- 경작지 면적의 파악 : 토지측량(양전, 量田).

- 「농사직설」편찬(세종대).

- 측우기 제작 - 강우량 측정(세종대).

-  「칠정산내외편」편찬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달력 사용.

- 흉년에 대비하여 「구황촬요」와 「구황촬요언해」 편찬(명종대).

- 목화 재배의 확대 보급.

- 임진왜란으로 경작지 다수 황폐화.

 

 

 

 

 

 

 

 

 

 

 

국영농장

 

"새로운 농업경영의 탄생 선진농업의 산실 - 수원의 수리시설과 둔전"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는 오늘날의 수원인 화성 인근에 대규모의 수리시설을 축조하여

이를 기반으로 대유둔과 축만제둔(서둔)으로 대표되는 국영농장을 설치하였습니다.

만년제 · 만석거 · 축만제(서호) 등의 수리시설은 늘 물의 양이 일정하게 유지되었고,

내보내는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이는 수문을 설치하여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둔전은 종자와 소를 나누어주고 경작지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경영되었으며, 생산물은 화성에

주둔하는 군대의 식량과 운영하는 경비를 충당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국영농장이 가지는 큰 의의는 경험 많은 농부와 젊은 농부를 짝지어 경작지를

나누어주고 농사를 짓게 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농사방법을 전수하는 농업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청제비

 

삼국시대의 저수지인 청제(청못)는 맥류를 주작물로 하던 신라에서 벼농사가 정착되던

5~6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청제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하나는 양면에 글이 새겨진 '청제비'로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법흥왕 23년, 536년) 한

내력을 앞면에 새겼고(병진명), 뒷면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청제를 수리(원성왕 14년, 798년)

한 기록을 새겼습니다(정원명).

청제비 옆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비석으로 땅에 묻혀 잊혀져 가던 청제비를 찾아내어 다시

세웠다는 내용의 '청제중립지'가 서있습니다.

청제비는 우리나라의 수리시실 발달을 잘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

 

보물 517호
경북 영천
조선 숙종 14년(1688)

 

흙속에 묻혀있던 청제비를 찾아 다시 세운 내력을 새긴 비석으로 청제를 수리한 후 세웠던

'청제비 정원명(798년)의 내용을 인용하고, 「훗날 사람들이 이 비로 인해 청제를 허물지

말아야 할 까닭에 생각이 미친다면 비가 제방에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라고

비석을 세우는 뜻을 밝혔다.

 

 

 

 조선시대 후기 농업

 

모내기의 전국적인 보급과 밭작물 1년2작 재배의 정착.

실학의 발달과 농법개량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 후기에는 모내기(이앙재배)가 전국적으로 널리 행해졌고,

거름내기 · 그루갈이(근경, 根耕), 씨뿌리기(파종, 播種), 사이짓기(간종, 間種) · 작부체계 등의 영농기술이

 더욱 개선되어 2년3작 또는 1년2작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18세기 이후에는 실학(實學)이 발달하면서 실학자들에 의한 각종 농업기술서가 간행되었고,

이에 따라 농사법의 개량과 농업경영방식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흉년일 때 주식을 대신할 수 있는 고구마 · 감자 · 옥수수 같은 구황작물이 널리

재배되었으며, 고추가 들어와 오늘날과 같은 김치가 등장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농업의 생산력 증대, 상업작물의 본격 재배, 농업경영의 변동 등으로

농업이 경제발전을 주도하여 근대 사회로 발달해 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1592년 ~ 1896년 개항)

- 농경지 개간 증대와 논 면적의 확대.

- 벼농사에서 이앙법(모내기)의 확대 보급.

- 벼와 보리의 이모작 등장.

- 상업적 작물(담배, 차, 약초 등) 재배의 확대.

- 인삼의 인공재배기술 보급 : 가삼 재배, 홍삼 제조.

- 서양식 농업기술의 소개: 수리기술.

- 외래작물(고추, 담배, 고구마, 감자) 재배.

- 전국의 농서 수집과 새로운 농서 편찬(정조대).

- 농학과 수리학의 발달 : 실학의 발달.